(6월 7일) 아브라함과 이삭 - 창 22장 8~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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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토) | 창 22장 8~14절 | 아브라함과 이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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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고귀한 아버지’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아브람’을 (창 17:5)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아브라함’으로 바꿉니다. 세상에서 가치를 찾는 ‘고귀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가는 가치관으로 그의 삶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삭을 출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이삭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이어 언약을 이어갈 족장이 되게 합니다.
이 과정의 중심에 한 중요한 한 사건이 전개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낳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도록 하는 시험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도록 하는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지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장자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반응해야 할까요?
(8~9)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에 대해 아브라함처럼 즉각 순종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하며 이삭처럼 복종하는 순종의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해 혈육의 선택이 아니라 언약의 중심에 가정이 세워지도록 신앙으로 지도합니다. 이때 (창 21:12)에서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라며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더하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여기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떤 신앙의 자세를 취했을까요? 그는 즉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순종의 걸음을 걷습니다. ‘삼일의 길’을 걸었을 때 아들 이삭이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예물을 준비하셨다”
번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삭의 질문 속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신앙 가운데 잘 가르치고 양육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거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삭은 자신이 번제단에 올려지기 위해 결박당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예물이 자신이라는 것에 순종으로 반응합니다. 절망 같은 순간에도 이삭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길을 걷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면 아브라함처럼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으로 반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부딪힌 상황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이 맞다면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이삭처럼 자신을 번제단에 드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의 다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10~12)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에 대해 피할 길을 먼저 찾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부활의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 앞에 담대하게 서는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모리아 산의 번제단에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에서 이미 칼날이 이삭의 목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이삭의 목을 내리치고 있는 아브라함의 손목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통해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이삭을 향한 칼날을 멈추도록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모습을 인정합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집니다. 이삭이 번제로 드려지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릴 것을 확신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단에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창 21:12)의 가르침과 (창 22:2)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부활을 확신하는 신앙’으로 반응한 결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에 대해 아브라함처럼 노크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자신의 피할 길을 먼저 찾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으로 반응하는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 앞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으로 담대하게 서는 아브라함,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신앙으로 반응하는 이 시대의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13~14)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하심에 대해 끝까지 순종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호와의 이레를 목격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상황과 주변의 환경에 굴복당하여 포기되는 순간 그에게 예비되었던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의 축복은 거둬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은 ‘여호와 이레’의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한 것에 대해 아브라함의 순종과 이삭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끝을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할 ‘한 숫양’을 줍니다. 그러나 수풀에 예비된 ‘한 숫양’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셨던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예비 된 ‘한 숫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에 대해 의심하거나 불순종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는 가운데 발견된 열매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은 모리아 산의 열매인 ‘여호와 이레’로 응답받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필요에 대해 친히 준비해줍니다. 그리고 (약 1:25)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는 신앙은 번성하지 못합니다.(신 28:62) 그리고 (삼상 15장)의 사울처럼 자신의 왕위가 영원히 거둬지는 값으로 응답받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하나님의 명하심에 대해 끝까지 순종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호와의 이레’에 대한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연입니다. 반면 성화 과정 가운데 놓여 있는 신앙은 우리의 의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적 결정에 따라 성령님께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환경은 구원받은 이후의 삶인 성화 과정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 사람의 신앙에 따라 다른 결론의 열매로 응답받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비춰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한 것에 대해 망설이고, 주저하는 순간 마귀의 속삭임이 그 사람을 다스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부활의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 앞에 담대하게 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하심에 대해 끝까지 순종하는 신앙 있는 자세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호와의 이레’에 대한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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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아브라함의 즉각적인 순종의 자세와
이삭의 복종하는 순종의 자세를 보면서
나를 돌아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지난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주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나의 모습은 즉각적인 모습과 복종하는 모습으로 순종을 하였는지
나를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때때로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삼아
나의 일들이 먼저였던 어리석고 게으른 신앙의 모습이었지만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을 바라보며
날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들은
의심하지 아니하고
주저하지 아니하고
망설이지 아니하고
즉각적이고 복종하는 순종의 자세로 나아가는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부활의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 앞에 순종하며
담대하게 나아가는 '여호와 이레'의 주인공이 되는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