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복이 있는 사람(2) - 마 5장 6절 ~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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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주) | 마 5장 6~8절 | 복이 있는 사람(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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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적을 간단하게 소개한 후, ‘기독교윤리의 대강령’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실제적인 규범에 관한 내용을 기록합니다. 계속되는 가르침은 어느덧 네 번째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불 것이요” ... 예수님은 말로만 떠들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만 하는 파렴치한 스승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삶 그 자체가 본이 되는 스승이었으며, ‘언약’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그 언약을 지키는 ‘신실성’을 지닌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는 ‘팔 복’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고 계실까요?
(6)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탄식하고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갈급해하는 복이 있는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팔 복 가운데 네 번째 가르침에서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의’와 관련하여 윤리적인 면에서는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느끼며 ‘의’를 갈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는 헬라어로 ‘다카이오쉬네’라고 하여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은 심판으로 멸하고, 의인은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에 대하여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양분하여 서로를 완전히 별개인 것처럼 다루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원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모양으로도 진정한 ‘의’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시키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는 자’에게는 두 가지의 분명한 현상이 그에게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불의한 현상들을 가슴 아파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어가기는 일에 자신을 헌신적으로 드립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성’에 대해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의 ‘죄 사함’과 구원을 바라봅니다. 이런 자에게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탄식하고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갈급해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영적인 회복의 역사를 일으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에 대해 해결이 충만하게 되고, 모든 것이 차고 흘러넘치는 축복으로 응답받게 될 것을 “배부를 것”으로 약속하셨습니다.
(7)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 긍휼함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엘레에몬’이라고 하며,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라고 하여, ‘자비’와 ‘동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는 감정에 대한 공감뿐 아니라 어려움을 타개하는 일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성을 가지고 끝까지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긍휼’이라는 것은 베풀어도 되고, 안 베풀어도 되는 선택사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긍휼은 이웃을 향하여 가슴으로, 그리고 물질로, 눈물의 기도로, 복음 전도로 그들을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히 갚을 길이 없는 억만 죄악 가운데 놓인 인류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주님께 빚진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웃을 향해 긍휼의 손길을 베푸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8) 거짓과 위선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복 있는 자가 되길 원하고 계십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거울입니다. 마음은 헬라어로 ‘카르디아’라고 하여 사람의 ‘생각’과 ‘뜻’ 그리고 ‘감정’이 있는 ‘좌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을 합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눈에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또한 죄인입니다. 단지 우리 눈에 선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사람의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마음의 정결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부여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부여잡은 마음은 ‘이중적인 마음’을 품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십자가를 그 마음으로 부여잡은 믿음 있는 자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한 세속적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복 있는 걸음을 걷게 됩니다. 창세기 22장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믿음으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한 숫양’을 ‘수풀’에 예비해 두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적용)
세상의 물질적 소유보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회복의 역사와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갈 때도 모든 문제해결에 대해 충만함으로 그 문을 열어주는 축복으로 응답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받으며,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나아가는 자는 ‘영생복락’의 축복을 받습니다.
신령한 하늘의 양식을 쫓아 살아가는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배타적인 신앙관을 가진 자는 ‘악’은 ‘악’으로 갚고, ‘눈’은 ‘눈’으로 상대에게 갚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행동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건한체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려는 이중적인 신앙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두 마음’을 품었던 가룟 유다는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녕 복이 있는 자는 두 마음이 아니라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 오직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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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세상 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앙관으로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갈급해 하며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며
거짓과 위선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
하나님께 복 받는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coco님의 댓글

세상의 불의를 탄식하게 하시고
저의 죄성을 깊이 깨달아 진정으로
회개하게 하소서
상대를 긍휼히 여기며
이해하는 마음을 품게 하시고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을 향한 한마음을 품고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