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흥하고 쇠하여야 할 것 - 요 3장 22~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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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화) | 요 3장 22~30절 | 흥하고 쇠하여야 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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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실 메시아’를 예비할 목적으로 ‘세례 요한’을 이 땅에 허락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관련하여 메시아인 ‘예수’의 길을 예비할 목적으로 역할을 감당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도록 명한 것도 이런 맥락과 연결됩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광야에 거하면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집단생활을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불거집니다. 어디든지 집단을 이루고 세력을 형성하게 되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이 생기게 됩니다. 경계선은 구별 점이며, 상대와 편 가름의 선이 되기도 합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편을 가르는 경계선을 만듭니다. 그의 제자들은 세례 베푸는 예수님을 자신들을 모방하는 경쟁자로 여깁니다. 불평하고, 분노합니다. 여기에 대해 세례 요한은 ‘역할론’으로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흥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명성은 높아질 것이 아니라 쇠하여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과 역할을 돌아봅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비춰봅시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흥하게 하고 무엇을 쇠하게 해야 할까요?
(22~26) 편 가르는 세력 확장과 자기 사상을 주입하는 사역은 쇠하게 하고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 사명과 사역은 흥하게 만들어가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를 통해 예수님은 ‘공생애’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음을 줍니다. ‘공생애’는 자신의 영광을 위한 ‘자기 생애’가 아니라 죄를 대속하기 위한 사역이며, 이 사역이 자신의 사상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의 사역’이 될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역이 될 것과 죄 사함의 사역이 될 것을 세례 베푸는 장면을 통해 밝힙니다. 요한의 가르침과 세례가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는 말씀’이었고 그림자로서의 세례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신 메시아가 전하는 ‘완성된 말씀’이고 죄 사함의 완전한 세례였습니다.
‘한 유대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 사이에 예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중에 누구의 세례가 더 나은 것인지 논쟁이 벌어집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요단 강 저편에서 선생님이 증언했던 그분이 선생님처럼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따른 주어진 사역과 역할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교회가 세워진 것은 역할을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자기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세워진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목적은 작은 교회를 큰 규모로 키우는 세력 확장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사명과 사역이 있습니다. 편 가르는 세력 확장과 자기 사상을 주입하는 사역은 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 사명과 사역을 흥하게 만들어가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7~29)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역이 자기중심이 되지 않도록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은 흥하게 하고 자신은 사역의 조연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로부터 세례 논쟁을 들었던 요한이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것은 주연과 조연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27절)의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라는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과 자신은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주연과 조연의 역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대속을 이루실 분’이며, 자신은 ‘그 앞에 보내진 자’로서의 역할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친구와 손님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이라면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신부’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위치가 ‘신랑의 친구’로서 ‘혼인 잔치’를 축하하고, 함께 기쁨을 나눌 자리에 세워진 자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마 16:24)은 조연이 어떤 위치인지 증거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조연의 첫 번째 조건은 ‘십자가 신앙’으로 자신을 녹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대의 중심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야 합니다. 세 번째는 (행 20:24)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은 흥하게 하고 자신의 사역은 조연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30) 자신의 명성을 쌓으며 추종 세력을 만들어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가운데 왕성하게 일어나는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붓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사역이 자신의 명성을 높이거나 자신의 추종 세력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일들이 흥하고 세례 요한의 사역이 쇠하여야 할 이유가 시대의 대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의 사역에 또한 ‘흥하여야 할’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쇠해야 할’ 사역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현재 시제’의 ‘진행형’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 봅시다. 교회로서, 성도로서 행해야 할 역할은 그리스도를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명성이 아닙니다. 교회의 브랜드에 따라, 세워진 사역자의 명성에 따라, 말 잘하는 자의 입술의 화술에 따라 그리스도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를 다니는 것이 브랜드처럼 되어버린 웃지 못할 시대 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명성을 쌓으며 추종 세력을 만들어가는 단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가운데 왕성하게 일어나는 사명과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무엇이 ‘흥하고’, 무엇이 ‘쇠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요한은 ‘역할론’으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역할은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비하는 자’로서의 역할입니다. 이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이루어져야 할 ‘현재 진행형’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모든 사역의 중심에는 오직 한 가지만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브랜드가 된다든지, 사람의 명성이 중심에 세워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며 사역의 주연은 예수님이 되고 우리는 조연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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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말씀 묵상을 하면서 예전에 노방에서 전도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교회가 개척된지 얼마 후 전도를 하는데
옷도 메이커를 사서 입듯이
교회도 대형교회를 가리키며 교회를 가야한다는 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브랜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큰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명성과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며
사역의 주인은 예수님이며
성도와 나는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
편가르는 세력 확장이 아니라
자기의 사상을 주입하는 사역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쌓아 추종세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며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와 나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예수님의 십자가 신앙 안에서 내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으며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그분을 만날 날을 기쁨으로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