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성도의 모습 - 요 4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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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수) | 요 4장 1~10절 | 성도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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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치욕적인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한 사건은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사건이며, 두 번째의 사건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입니다. B.C 586년의 사건이 바벨론의 군사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짓밟힌 ‘국치일’이었다면, B.C 722년의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은 앗수르의 혼합정책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모욕당하는 날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맥을 끊기 위해 3가지 혼합정책을 펼칩니다. 이방인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거주민의 혼합, 혈통의 혼합, 종교의 혼합을 이룹니다. 이렇게 해서 태동한 것이 사마리아 종교였으며,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 지역을 부정하게 여겨 상종하기를 꺼렸으며, 사마리아를 지나갈 일이 있어도 그곳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길은 멀어도 다른 우회도로를 택합니다. 이런 곳을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갑니다. 사마리아를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돌아보면서 우리는 세상을 향해 어떤 성도의 모습으로 자신을 세워나가야 하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1~2) 성도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며, 그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한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예수님의 ‘회개의 복음’은 많은 영혼을 일깨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회개의 복음’은 더욱 왕성해져 유대 사회의 커다란 이슈가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두 가지 측면에서 충돌이 불가피해집니다. 첫 번째는 세례를 자신들만의 고유권한으로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특권층과 충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유대인들을 향한 세례에 대한 충돌이었습니다. 당시 ‘회개에 따른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행해졌던 예식이었습니다. 이런 세례를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한 모독 행위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를 자신들의 특권이요,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우월감으로 여기고 있을 때 예수님은 회개를 통해 유대인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구원함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불의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자들과 타협을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와 타협은 곧 사탄과의 동침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우리의 모든 행위는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팔아먹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아신지라!” 무엇을 행하든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리스도의 한 방편을 나타내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3~8) 성도는 소외된 자들을 친히 찾아가셨던 예수님처럼 그들을 가슴으로 품는 실천하는 위로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복음 사역을 위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합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사마리아였습니다. 일반적인 유대인이라면 선택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그 성읍 중심인 ‘수가’라는 동네를 찾아갑니다. ‘수가’라는 곳은 역사적으로 ‘세겜’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창 34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이라 일컫는 ‘야곱’이 자신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다가 형 에서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거주했던 장소였습니다. ‘수가’라는 성읍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는 것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때는 로마 시간으로 여섯 시쯤이었습니다. 유대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정오 12시, 태양이 작열하여 물을 길으러 나오는 사람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도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는 시간, 예수님께서는 누군가와 중요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곳에서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를 가슴으로 품는 일에 있어서 머리로만 알고, 뜻만 있는 위로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소외되고, 대접받지 못하는 영혼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고, 진리의 복음을 흘려보내며, 그리스도의 가슴으로 진정으로 그들을 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9~10) 성도는 영적 무지와 자기 생각에 빠져있는 세상을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쪽으로 반응하도록 빛의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향해 물을 달라는 예수님에게 반응합니다. “당신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로 취급하여 상종도 안 하면서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네가 만약 네게 물을 달라고 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너는 지체하지 않고 그에게 물을 줬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영원한 생명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의 수가에 살고 있는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 빠져있었으며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가 자신에게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세상을 회피하며,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선택하여 우물을 길러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던 것입니다. 이런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여 영생의 생명수를 받는 자가 되라고 빛의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고 있습니다. 사탄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을 바라보며, 세상을 달려가도록 합니다. 이런 세상을 주님이 원하는 생명수를 마실 수 있도록, 순종의 걸음을 걷도록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영혼을 무엇으로 깨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으로 그 영혼을 깨우고 있듯이 빛의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는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행 8:5)에 의하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쫓은 빌립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꺼렸던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결과 (행 9:31)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볼 때 그들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믿었던 사마리아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는 주님의 가슴으로 3가지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야 합니다. 진리의 복음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문화를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야 합니다. 지역과 나라와 민족을 넘어 사마리아와 같은 소외된 곳까지 그리고 땅끝까지 이 운동을 힘 있게 전개해 나가는 성도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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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바리새인들은 세례가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여겼고
유대인들은 부정하게 여긴 사마리아를
예수님은 회개를 통해 구원을 말하고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소외된 지역을 직접 찾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할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소외된자들을 가슴으로 품는
위로자의 모습이 되기를 원하며
세상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를 원하며
빛의 말씀으로 그 영혼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잘 감당하는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때로는 만나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먼저 판단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나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하면서
회개하며 예수님께서 품으시고 실천하셨던 그 사랑을
오늘 나의 삶속에서도 그 사랑을 전하며
그 말씀을 세상가운데 흘려보내어
나라와 민족와 지역을 넘어 사마리아와 같은 소외된 곳까지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역을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주님께서는 나의 모든 생각과 말 행동을 아시기에
나는 그분께 모든 문제를 온전히 맡기길 원하며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깨어 기도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가며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