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 예배의 회복자 - 요 4장 20~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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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목) | 요 4장 20~24절 | 예배의 회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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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초기 유대 사역을 마치고 사역 중심을 이룰 갈릴리로 가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중에 사마리아 지역을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우물가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만납니다. 마실 물을 요구하면서 여인과 말을 이어 가던 중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알도록 합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자신의 숨겨진 모습까지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놀라며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여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해묵은 논쟁 가운데 하나였던 예배 장소에 대한 것으로 문제를 전환 시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배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 앞에 우리의 예배는 무너짐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이 시대 앞에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봅시다. 그리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야 할까요?
(20~21) 형식과 행위뿐만 아니라 예배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며 상처와 무너짐 속에 방치되어 있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바르게 인도하는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갈등은 역사적 흐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B.C. 537년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하여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도 성전 재건에 동참하길 요구합니다. 그러나 (스 4:1~6)에 의하면 이방인으로 여김을 받았던 사마리아인들의 요청은 거절당합니다. 이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더 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성전 재건에 거절당한 사마리아인들은 B.C. 322년 역사 가운데 한 장소였던 ‘그리심 산’에 자신들이 성전을 세웁니다. 그러나 B.C. 129년 하스모니아 왕조의 힐카누스에 의해 무너짐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루살렘과 ‘그리심 산’ 가운데 “어느 장소가 진정으로 여호와를 예배하는 장소입니까?”
이 여인의 중심에는 예배하는 장소적 의미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리심과 에발산’도 아니었고, ‘예루살렘’도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형식과 행위가 아니라 본질을 바르게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들을 보면 예배를 무너뜨리는 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체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나가 사라지면 또 다른 하나가 등장하는 연속선상 위에 있습니다.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형식적이고, 행위뿐인 예배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요소가 보입니다. 그리고 상처와 무너짐 속에 방치되어 있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바르게 인도하는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22~23) 마귀와 결탁하고 있는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도록 불의 가운데 놓여 있는 세상의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인도하는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우상숭배적 요소를 가진 장소적 개념의 예배를 지적합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구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중보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진정으로 나아가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유대인은 결코 선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음의 시작을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창 12:3)에서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구원의 완성을 이룰 메시아가 유다의 후손을 통해 이뤄질 것이 (창 49:10)에 언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언약이 유대인들의 특별함이 근거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작의 도구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를 통해 ‘모리아 산’이 있는 예루살렘이 예배의 처소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에배는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장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상숭배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세상 영혼들을 참된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인도하는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24) 영적 흑암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의 영혼들을 신앙의 인격으로 깨우고 이들에게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숨길 수 있는 것도, 어떤 것으로 자신을 가릴 수도 없다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진실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거짓과 허위로 포장된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라고 하였습니다. 형식적인 물질이 아니라 신앙을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그 사람 신앙의 인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헛된 예물을 싫어합니다.(사 1:13)
예수님께서 영적 흑암에 사로잡혀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영을 깨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처럼 영적 흑암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의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든 삶의 중심에 두는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감성적으로 예배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추는 예배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숨길 수 없고 가릴 수 없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도록 세상의 영혼들을 신앙의 인격으로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법을 가르는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시 92:13~14)은 이렇게 축복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예배는 ‘영적인 것’입니다. ‘형식’과 ‘행위’로는 ‘영적인 것’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인격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배 회복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자를 기억합니다. 우리의 서고 넘어짐은 예배 가운데 있습니다. 예배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세상의 영혼들을 바른 예배 자리로 인도하는 예배의 회복자가 되어 하나님께 기억을 남기는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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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적흑암에 사로잡혀있는 사마리아 여인의 영을 깨워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예수님
이 시대 교회와 예배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은 형식과 행위적이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이 시대는 예배의 본질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으며
예배와 기도의 시간들을 줄여가는 교회들을 봅니다
나의 시간에, 취향에 맞추어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여야 합니다
예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영적 흑암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의 영혼들에게 말씀과 신앙의 인격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리로 인도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나는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되기를 바라며
주변의 이들을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는 예배의 회복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