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나의 신앙관은 - 요 6장 1~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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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월) | 요 6장 1~15절 | 나의 신앙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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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한 ‘오병이어’의 기적의 역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 정도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던 이 사건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목적이었을까요? 당시 현장에는 두 무리가 등장합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모여든 무리였으며, 또 한 무리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역사적 사건은 이 두 무리의 신앙관에 대한 예수님의 바른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에는 제자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의 헌신적인 손에서 나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축사가 기적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어떤 신앙을 가르치고 계셨을까요?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세워나가야 하는지 함께 비춰볼 수 있어야 합니다.
(1~4) 자기중심의 인본주의 신앙은 주님의 겉만 알뿐입니다.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자신의 모습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2년쯤 흘렀을 때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사람들은 목격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듭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이때 무리가 갈릴리 전역을 돌며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께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장소를 선택합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을 찾아 ‘그 산’으로 모여든 무리입니다.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였으며 ‘그 산’에 함께 앉아 있는 제자들입니다. 두 무리는 분명히 그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나 두 무리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앙들이 한결같이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앞세운 ‘인본주의 신앙’이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로 큰 무리가 모여든 이유는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환경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였습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였습니다. ‘큰 무리’도, ‘제자들의 무리’도 예수님의 껍데기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삶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신앙’은 우상숭배와 같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겉모양만이 아니라 (갈 5:5)의 말씀처럼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자신의 모습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5~9) 자기 편견과 판단의 신앙이 아니라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으로 자신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빌립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빌립을 지목하여 질문을 던진 것은 그의 신앙이 마치 제자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본문 6절) “빌립아!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은 대답합니다. “각 사람에게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주더라도 이백 데나리온으로는 부족합니다!” 빌립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마음으로 판단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음식을 공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 편견과 자기 판단이었습니다. 이때 뒤에서 봉사하기를 즐겨하던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그는 한 아이가 건네준 헌신적인 음식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로 가져갑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의 이 말은 자기 편견과 자기 판단이 앞섰던 빌립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음식이 ‘너무 적다’라는 안드레의 절망감과 함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나머지 부분은 예수님께 맡긴다는 예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이 함께 실려져 있었습니다. 자기 편견과 자기 판단으로 단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런 신앙의 걸음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10~15)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거나 가볍게 여기는 신앙 그리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려는 신앙은 주님을 떠나버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축사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무리가 원대로 먹습니다. 모든 식사가 마무리되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합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예수님의 조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하나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주신 은혜를 늘 생각하며,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충만의 역사를 ‘오병이어’ 가운데 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라는 기적의 역사를 바라본 무리의 반응은 “역시! 이분은 그 선지자였구나!”였습니다. 그들 속에 나타난 반응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 삼는 것이었습니다. 신적 통찰력으로 무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다시 혼자 산으로 갑니다. 그들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거나 가볍게 여기는 신앙 그리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려고 주님을 붙잡는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주님이 머물지 않습니다. “떠나가시더라!”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주님을 두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사용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신을 쏟아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다섯 가지의 신앙관’을 통해 나의 신앙관을 재점검해 보도록 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 신앙관’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편견’과 ‘자기 판단’이 중심이 된 신앙입니다. 세 번째는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관’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거나 가볍게 여기는 신앙’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신앙’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신앙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인가요? 내가 계산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어 가는 신앙관으로 자신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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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제자 빌립과 안드레를 바라보면서
나의 모습도 빌립과 같은 모습인거 같아서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며 회개하며
나의 신앙이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지도록
말씀의 양식으로 나를 채우고
하나님 나라위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고 다짐을 하지만
내 생각 내 판단대로 하는
내 중심적인 인본주의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도 내 안에 있는 쓴 뿌리들을 제거하고
말씀으로 나를 채워
오늘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하나님께 내 필요를 채워 달라고 구하기보다는 이미 내 모든 필요를
다 아시는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립니다
나는 오직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내 마음이 더욱 간절히 그분을 향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쓰실 만한 그릇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