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예수님만을 바라보기 - 요 10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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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월) | 요 10장 1~6절 | 예수님만을 바라보기 |
(도입)
세상이 아무리 강퍅하고, 혼돈 가운데 놓여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하나님 나라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때로는 인자하심을 통해, 때로는 길이 되어주시고, 때로는 문이 되어주시고, 때로는 성벽이 되어주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했던 ‘소경’의 눈을 회복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로운 일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불법을 행한 자로 여기며, 예수님을 처벌하려고 합니다. 안식일 소경의 눈을 치료한 것을 안식일 법 위반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그것을 법으로 만들면 법이 되고, 다스리는 원칙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바른 원칙과 바른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그 원칙과 기준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불법과 탈법이 판을 치는 세상에 놓여 있는 우리는 어떤 원칙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까요?
(1~2) 불법을 일삼는 마귀의 미혹에 넘어져 멸망의 걸음을 걷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의 길로 인도하는 바른 교리의 가르침을 통해 목자인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된 진리를 만들어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도록 하는 바리새인들의 터무니없는 안식일법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비유적 단어로 그들을 깨웁니다. ‘양’과 ‘강도’ 그리고 ‘양의 목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적 단어를 통해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양을 훔치기 위해 울타리를 넘어 들어온 ‘강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율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위치에서 또 다른 유권해석을 통해 만들어낸 불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양의 울타리를 넘어가 양을 훔치는 강도의 행각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죄 사함의 구원과 심판’을 가르치기보다 ‘기복적 신앙’을 가르치는 자는 울타리를 넘어가서 양들을 미혹하는 강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예배를 인도하지 않는 자는 울타리를 넘어 양들을 속이는 강도입니다. 신앙의 회초리로, 때로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기보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권모술수하고, 감원 이설하는 자는 울타리를 넘어가서 양들을 속이는 강도입니다. 제자 훈련한다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수종 들게 만들고, 자신이 그 중심에 있는 자는 울타리를 넘어 주님의 양을 훔치는 강도와 같은 자입니다. 불법을 일삼는 마귀의 유혹은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길로 인도하는 바른 교리의 가르침을 통해 목자인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5) 거짓된 목자에게 속지 않도록 바른 교리의 가르침으로 분별력을 길러내는 청지기와 같은 교회 그리고 바른 가르침을 통해 주님만을 바라보기를 갈망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에 의하면 영적인 ‘강도’는 멀리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또 다른 유권해석을 통해 주님의 양을 자신의 양으로 만드는 ‘도둑질’을 일삼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반대되는 한 사람을 가리켜 ‘문지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하 23:19)에 의하면 성전의 ‘문지기’ 역할은 성전에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지켜내는 중요한 위치에 놓인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와 같이 불법한 자가 아니라 진실된 ‘문지기’가 되어 양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청지기’가 되라고 바리새인들을 향해 일침을 가합니다.
양은 자신에게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면서 자신을 인도하는 ‘문지기’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거짓됨으로 양들을 속이는 ‘문지기’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거짓된 목자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바른 교리의 가르침으로 분별력을 길러내는 청지기와 같은 십자가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가르침을 통해 주님만을 바라보기를 갈망하는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문지기’의 음성이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확실히 각인될 때 비로소 가짜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겨납니다. 이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합니다.
(6) 거짓된 교리에 사로잡혀 진리의 길을 왜곡되게 아는 어리석음에 머물지 않도록 바른 교리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과 영적으로 바르게 교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울타리를 넘어가는 강도의 가르침’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가리켜 하나님의 양을 훔치는 도둑질이라고 비유를 통해 가르치지만 ‘영적 흑암’ 가운데 놓여 있는 ‘강도와 같은 자들’은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 흑암’에 놓인 자들에게는 ‘진리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 82:5)의 말씀처럼 바른 교리에 대해 알기를 갈망하지 않는 ‘우매한 자’는 ‘영적 흑암’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거짓된 교리에 사로잡힌 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어리석음에 지배를 당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마귀와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영적인 바른 교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영적인 바른 조명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요 1:9), “그리스도는 사람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리고 (히 6: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빛을 비춰 줍니다.” 그런가 하면 (요 16:13~15),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장래 일을 알게 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영적인 바른 교통’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거짓된 교리에 사로잡혀 진리의 길을 왜곡되게 아는 어리석음에 머물지 않도록 바른 교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영적으로 바르게 교통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통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어떻게 교통을 이루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적 교통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바른 교리의 가르침이 여기에 대해 길을 열어줍니다.
불법을 일삼는 마귀의 미혹에 넘어져 멸망의 걸음을 걷지 않도록 바른 교리의 가르침을 통해 목자인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영적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된 교리에 사로잡히게 되면 진리를 왜곡되게 알 뿐만 아니라 마귀와 교통하며, 멸망의 길로 인도를 받게 됩니다. 바른 가르침을 통해 주님만을 바라보기를 갈망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영적으로 바르게 교통하는 성도가 되어 진정으로 복된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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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거짓된 미혹의 영의 속한 무리들이 많은 이 시대
영적 분별력이 없어 거짓과 함께 하는 무리들
불법과 부정을 일삼는 거짓의 무리들
편법을 합법처럼 위장하고 속이는 무리들
세상은 강팍하고, 혼탁하고, 혼돈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배우며
진리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며
말씀을 세상에 알리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은 날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말씀이 삶이 되기를 원하며
예수님과 영적 교통을 하는 복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찬양합니다
coco님의 댓글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가 있는 교회에 다닐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또한 바티스 말씀을 통해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묵상할 수 있음에
더욱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다시오시는 그날까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