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종교개혁 - 요 2장 13~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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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금) | 요 2장 13~17절 | 예수님께서 행하신 종교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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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일으켰던 성전 정화는 공생애 사역의 초기와 말기에 거쳐 두 번 일어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초기 사역이었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부패상을 부각시키면서 하나님을 향한 죄악을 깨우치도록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세워진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건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가리켜 “부패하고, 타락하고, 음란이 판을 치는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를 통해 동시에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작 주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일으켰던 종교개혁을 돌아보면서 이 시대 우리는 어떤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하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13~15) 교회가 상업과 인맥을 쌓는 곳이 아니라 죄인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회개의 장소가 되도록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민 9:2)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종되었던 과거의 모습과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대인의 절기를 지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에 기가 막힌 장면들이 포착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장소가 장사꾼들로 들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예수님께서는 노를 발하시며, 종교를 빙자해 상업을 펼치고 있는 짐승의 우리를 깨트려버리고, 돈 바꾸는 환전상을 엎어버립니다.
구약성경에는 종교개혁에 관한 내용이 일곱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개혁들은 대부분 왕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사’와 ‘여호사밧’ 그리고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남유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면, ‘예후’의 종교개혁은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유일한 개혁이었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이 무너진 이후 포로 귀환기에 일어났던 제사장 ‘에스라’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느헤미야’의 개혁들이 있습니다. 이런 종교개혁의 특징과 공통점을 한 가지로 표현하면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개혁을 외치기 전에 먼저 교회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상업을 하고, 인맥을 쌓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생업과 인맥을 만들기 위해 큰 교회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각성해야 합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이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교회가 마지막 때의 방주가 되는 것은 죄인을 담아내는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교회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교회가 상업과 인맥을 쌓는 곳이 아니라 구세주를 진정으로 만나는 회개의 장소가 되도록 개혁 운동을 일으키라”
(16)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장소가 되도록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의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자신의 공생애가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영적 갈등의 요소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성전을 가리켜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 대한 기능과 함께 자신이 행하고 있는 행동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은 성전의 ‘기능적 측면’을 설명합니다. 성전은 자신들의 소득을 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는 말씀은 성전의 기능을 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바른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만들지 말라’라는 말씀은 성전에는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전은 자신의 눈앞의 이익을 탐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말씀과 기도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기능처럼 교회의 기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사라지고, 세상적인 문화들이 자리를 잡은 교회, 하나님으로부터 징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 또 다른 하나의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게! 예배가 예배가 되게!”, 말씀과 기도를 되살리는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17)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오실 메시아에 대한 확신을 가슴에 안고 말씀의 삶을 이루어가는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열정은 마치 연인을 빼앗긴 자의 마음에 불타오르는 참을 수 없는 감정과 같았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제자들의 머릿속에 예수님에 대한 강렬함이 새겨집니다. 제자들은 (시 69:9)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 길을 여는 ‘주님의 날’, 그날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전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가슴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오실 메시아에 대한 확신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자는 말씀의 삶을 이루어가지 않고는 주님의 날에 어떤 소망도 희망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 15:31)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고 경멸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신 28:59)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 자는 재앙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혁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는 공동체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또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몸 된 교회인 성도의 삶을 통해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오실 메시아에 대한 확신을 가슴에 안고 말씀의 삶을 이루어가는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적용)
우리의 신앙이 근간을 이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가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근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신앙입니다. 이런 성도들의 모습을 만들어가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처소로서 교회의 기능입니다. 교회가 상업하고, 인맥을 쌓는 장소가 아니라 죄인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회개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날을 사모하는 가슴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세상을 개혁하기 전에 교회가 먼저 개혁되고, 우리가 먼저 개혁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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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음란이 판을 치는 시대라고 말을 하지만
정작 교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켰던
종교걔혁을 돌아보면서 이 시대에도
그 당시의 모습을 하는 교회들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상업과 인맥을 통한 교회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말씀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게
예배가 예배가 되게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떠한 불 필요한 요소들이 들어와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되어
나의 인격이 변화되고 나의 삶이 변화되어
주님이 다시오실 그 날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를 , 교회를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말씀과 기도로 돌아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온전히 그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내 삶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 철저한 종교개혁을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