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거듭나야 할 세 가지 - 요 3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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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토) | 요 3장 1~8절 | 거듭나야 할 세 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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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대속에 따른 공생애 사역을 펼쳐나갈 때입니다. ‘성전정화사건’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일으키셨던 표적을 보면서 예루살렘은 술렁이게 됩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삽시간에 펴집니다. 이때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며 율법에 정통한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요, 할례를 행한 민족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선민우월주의사상에 물들어 있던 유대인들을 향해 구원에 따른 ‘회개’와 ‘죄 사함’의 거듭남을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충격으로 와닿습니다. 니고데모는 여기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요, 회개와 죄사함의 거듭남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질문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거듭남’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3) 대속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의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으로 호칭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러나 이런 니고데모 또한 구원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만이라는 오해 속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말문을 엽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떤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지,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니고데모를 향해 먼저 “거듭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고후 5:17)에 의하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죄인이었던 옛 모습은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옛 모습이 죽는다’는 것은 아담의 원죄에 대해 죄사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영생’을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죄 사함은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성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는 (고전 3:16)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 그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의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마귀는 이런 우리를 마치 ‘돼지우리’에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가려고 ‘옛 모습의 옷’을 다시 입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음란’과 ‘타락’이라는 안개와도 같은 보석으로 유혹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으로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가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4~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은 니고데모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 되짚어 질문합니다. 그는 ‘거듭난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두 가지를 질문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질문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이 인생의 순리인데 어떻게 해서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니고데모의 질문은 “장성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다시 모태에서 태어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의 반문은 너무나도 정확합니다. 장성한 사람이 자신을 낳은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에는 정통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신령한 일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지식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어떻게!’라며 사람의 한계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씻는 역할을 합니다. ‘회개’와 ‘죄 사함’입니다. ‘물과 성령으로’라는 말씀은 죄 사함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셔야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의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의 신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6~8) 성령 안에서 육적인 모습을 씻어내고 영적인 모습으로 거듭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남이 무엇을 말하는지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왜! 거듭남에 대해 알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사람은 그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육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면 회개와 죄사함에 따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고는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니고데모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바람’의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바람은 어디서 생겨났으며, 어디로 가는지 사람은 그 정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그 사람의 의도와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거듭난 자는 성령이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바람이 어디서부터 부는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정욕을 쫓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여 그런 일들이 죄임을 알게 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성령의 사람으로 바꿔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성령 안에서 육적인 모습을 씻어내고 영적인 모습으로 거듭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거듭나는 것은 육에 속한 자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편에서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은 ‘영의 사람’에게는 죄 사함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는 은혜가 거듭남 가운데 임합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는 이런 거듭남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를 통해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대속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은혜를 발판으로 한 회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난 자로서 그 값을 다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이 땅에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 또한 잊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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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작은 간절한 소망의 기도와
한 성도님의 너무나 큰 아름다운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와져
나의 부족하고 미련했던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작은 것에 슬퍼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나의 모습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모든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육신에 속한 자의 행동과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어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날마다의 나의 신앙이 회개의 신앙이 되어
거듭난 자로서 성령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의 결실을 맺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늘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