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믿음과 신앙 그리고 삶 - 요 11장 39~44절
페이지 정보
본문
26일(수) | 요 11장 39~44절 | 믿음과 신앙 그리고 삶 |
(도입)
예수를 믿고 따르던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라는 오누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병’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도착하시기 전, 나사로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따랐던 제자들도 마르다와 마리아도 믿지 않습니다.
히브리스 기자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겉으로 보이도록, 밝히 드러내줄 것을 약속하는 ‘보증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일곱 번째의 표적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신앙의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39~40)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걸음은 어떤 이유인지 그리 바삐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체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 도착했을 때입니다.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여 오라버니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벌써 냄새가 납니다”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머무셨더라면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웁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이런 공통점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는 사람이 죽게 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사람의 시신 주변을 떠나지 않고 ‘삼일’ 동안 머물고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흘’만에 도착했다는 것은 나사로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나사로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과 판단을 아시고 비통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사망 권세가 아니라 생명의 길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일들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아멘!”으로 화답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삶 가운데 열매로 역사합니다.
(41~42)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도가 결실을 맺도록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해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따라 사람들은 나사로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의 ‘돌문’을 엽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합니다. (요 17:11)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중보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사역에 있어서도 성자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성부의 뜻을 이루는 중보적 역할을 감당합니다. 중보자 되시는 성자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께서 성부께 기도합니다. (마 26:39)에 의하면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자신의 뜻이 아니라 중보자로서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가의 ‘돌문’을 옮기도록 명하신 다음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신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절대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입증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의 결실을 맺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성을 가진 우리는 주변과 환경에 넘어지고, 시험에 들어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주님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믿음 있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때 나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될 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 예수님께서 중보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도가 결실을 맺도록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해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43~44) 구원은 ‘이미’라는 믿음의 형틀로, 신앙은 삶을 통해 ‘아직’이라는 형틀로 나아갈 때 동역하는 신앙의 자세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한 대로 무덤의 돌이 옮겨지고,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첫 번째는 죽은 시신을 향해 신적 권능으로 명령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놀랄 사건이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두 번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비록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나사로를 묶고 있던 것을 풀어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하나님 나라에 완전히 이르지 못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우리는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때 신앙의 성숙함을 위해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묶여있던 나사로를 다른 사람이 풀어줬던 것처럼 서로 동역하고 협력하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믿음 생활 속에서 상대가 보지 못하고, 상대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자가 아니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고, 묶여있는 것을 풀어주는 동역자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이미’라는 믿음의 형틀로, 신앙은 삶을 통해 ‘아직’이라는 형틀로 나아갈 때 동역하는 신앙의 자세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 앞에서 ‘나흘’과 ‘돌무덤’이라는 한계점을 거론하는 신앙은 자신의 믿음을 불가능이라는 한계점으로 끌고 가는 아주 좋지 못한 신앙이 됩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현실과 여러 경험 등을 통해 불가능을 발견하도록 충동질합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순간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완전함에 이러지 못하였습니다. 믿음과 신앙은 혼자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함께 끌어주고, 함께 언덕이 되어주는 동역과 협력하는 신앙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 이전글(3월 27일) 나를 통해 나타내야 할 또 다른 모습 - 요 12장 9~11절 25.03.26
- 다음글(3월 25일) 분별력을 가진 성도 - 요 10장 7~18절 25.03.25
댓글목록
행복한사람님의 댓글

구원 받은자로서 나의 믿음이 오늘도 반석위에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나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
진실되게 견고하게 어떠한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날마다 말씀위에 나를 세워
부끄럽지 않은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따라가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결실을 맺는
참된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입술로 떠드는 신앙이 아니라
겸손히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기를 원하며
공동체안에서 서로 동역하는 자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신앙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나는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며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나만을 바라보시는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내 안에 스며든
온갖 잡념들을 깨뜨려 나갑니다
믿음의 지체들을 만나 함께 동역하고 사랑을 나누며
믿음의 길을 함께 걷기를 소망합니다